미군 지원동기부터 BCT & AIT 마친 후기까지

미군 입대를 처음 생각한 건 2015년도 중반기에 Cornell University로의 편입 계획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차선책을 찾던 중 우연찮게 매브니(MAVNI)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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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으로 살아가는 PFC Jang의 얘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글쓰기에 앞서, 내 블로그에서 미군 훈련정보나 전투지식에 관한 상세정보 및 기밀사항은 일체 얻을 수 없다고 미리 알려드리고자 한다. (OPSEC is the key!) 나는 기밀사항을 다루는 직급도 MOS도 아니지만, 모든 군사정보는 unclassified로 분류된 정보라 할지라도 적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유용하게 쓰일지 모르기에, 내 사견이라던지 General하거나 혹은 이미 대중에게 공개된 사실만 기재할 것이다.

미군 입대를 처음 생각한 건 2015년도 중반기에 Cornell University로의 편입 계획이 꼬여버리는 바람에 차선책을 찾던 중 우연찮게 매브니(MAVNI)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고부터였다. 미국에서 정착하고자 마음이 생기면서 시민권에 대한 갈망 또한 커져갔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고, 괜히 쓸 때 없이 고민만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예전에는 Active Duty(현역) 밖에 선택할 수 없었지만 이젠 Reserve(예비역) 슬롯도 열리면서 매브니 병사들한테 주어지는 선택권이 많아졌기에  미군에 입대하는걸 한번쯤 고려해보게 됐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방문한 Long Island City, NY 모병소에서 단번에 지원서를 작성해버리고, 그날부터 계약을 완료할 때까지 한 달도 채 안돼서 일사천리로 운명처럼 미군에 입대하게 됐다. 실친 중에 매브니 1기로 현역입대해 제대까지 한 친구가 있어 진작에 이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는 있었는데, 당시엔 미국에서 정착할 마음도 없었고, 신체가 허약한 편이라 군대에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었다.

매브니로 입대한 경우엔 계약을 마치고 나서 최소 6개월을 대기했다가 Basic Combat Training(신병훈련)으로 갈 수 있었다. 요즘엔 대기기간이 길어져 최소 1년이라고 들었고, 몇 달 전엔 매브니에 보안문제가 생겨 입대까지 대기시간이 무기한 연장됐다고 들었다. 물론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꼭 재수가 좋다고 표현할 순 없지만,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싶다. 학교 생활을 바쁘게 하고 있었기에 신병훈련은 나에게 있어 꿀 같은 일탈이었고, 미국에 정착하는게 확실해졌고, 군인으로서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계획하며 기대감에 젖었었다. 훈련날짜가 확정됐을 땐 학기 도중에 훈련을 갈 순 없어, 학기가 끝나는 날에 맞춰 입대를 살짝 연기하고, 마지막 한 학기만 남겨둔 채 신병훈련을 떠났다.

평소 운동이라곤 하지 않는 앉아서 공부하는게 더 편한 학생이었고, CIA요리학교에 온 후론 음식에 미치다시피 한 친구들에게 둘러쌓여 있다보니 매일 밤 친구들과 술 한 잔하며 안주를 즐겨먹는 습관이 생겼고, 이 때문에 체중이 굉장히 늘었다. 몸이 무거운 상태로 뛰어다니느라 신병훈련 일주일만에 우측 무릎에서 통증을 느껴 참다가 참다가 결국 CTMC(군클리닉)에 가서 MRI를 찍어본 결과 stress fracture(피로골절)라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참을만 했는데 Drill sergeants이 내가 괜히 꾀병부린다며 억지로 훈련을 받게 하다보니 우측은 더 심각해지고, 정상적이었던 좌측 무릎마저 같은 증상이 생겨 목발 없인 아예 걷지 못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그 후론 Follow up과 Physical Therapy를 받아야 해 CTMC를 자주 가게 됐고, 프로파일 때문에 일부 훈련에서 열외됐다.

아프다 할 때는 꾀병이라고 하더니 정작 진단 받아오니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교관들이 너무 미웠다. 내가 할 수 없도록 명시된 훈련은 물론, 명시는 안됐지만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생각되는 훈련조차 교관들이 못하게 해, 오기가 생겨 한번은 굳이 열외를 하지 않고 다른 병사들 사이에 껴서 조용히 8K 행군 훈련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반환점에서 재수없게 교관한테 걸려 결국 열외 됐다. 행군이 끝난 후에 프로파일을 어기지 못하도록 나를 더 꼼꼼히 감시했고, 처벌로 다음날까지 <프로파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1,000자 에세이까지 쓰게끔 했다. 짬이 전혀 나지 않는 신병훈련 스케쥴에 속에서도 밤을 세어가면서 불가능한 에세이를 완성해서 제출했다. 교관들은 내가 완성 못하길 내심 바랬는건지 뭔가 아니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후론 세 교관 중 남자 교관 두 명은 내 마음이 더 상처 받도록 모욕적인 말을 일삼았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교관으로서 훈육차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더라도, 사적인 자리에서 더욱 심한 언행을 했다는 것은 아마 내가 그들의 무료한 교관 생활에서 화풀이대상 정도로 이용 당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여자 교관도 물론 상냥하진 않았지만, 엄격한 엄마처럼 챙겨줄 것은 제대로 챙겨주면서 실수했을 때만 채찍질을 했다. 그 외에도 말 못할 정도의 차별대우와 다른 병사들 앞에서 내게 욕을 하며 내 손목시계를 빼서 진흙탕에 던져버리는 모욕적인 사건도 있었다.

통증이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군인들이 이렇진 않을거란 희망을 가지며, 일단 BCT에서 나가고 보자는 생각에 내 담당 Physical Therapy 군의관한테 간청하여 프로파일을 없애달라고 설득했다. 그덕에 800mg 진통제를 4시간마다 꾸역꾸역 먹어가며 마지막 FTX3과 더불어 16K 행군까지도 열외 없이 무사히 마쳤다. 그 후 PT테스트도 죽기살기로 BCT 졸업만 생각하며 각 파트별로 50점 이상을 받아 통과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남자교관이 날 첫날인 Day 0부터 다시 신병훈련을 받도록 하는 NSO 요청을 했다. 실제론 내가 병원 예약 때문에 놓친 2개의 필수훈련만 보충하면 됐는데, 내가 이미 완료한 훈련조차 안 받았다고 DA Form 4856(카운셀링)에 허위기재해 중대장한테 제출했다.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할 소대 교관이 되려 나를 괴롭히다보니 그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다른 소대 교관한테 상황을 얘기해봤지만 결국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 의견은 묵살당했다. 결국 내 담당 군의관한테도 상황파악을 할 수 있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했고, 같은 대위끼리 한번 얘기해보겠다면서 우리 중대장한테 전화를 걸어 내가 여태 피로골절에 의한 통증을 참아가며 훈련을 마치려고 한 강한 의지를 전해줬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군의관의 도움으로 난 결국 못다한 두 개의 훈련만 보충하고 BCT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훈련은 나름 새로운 경험이라 충분히 견딜만 했지만, 교관들이 나에게 준 모욕감과 차별대우는 미군에 지원한 것을 후회하게끔 했다. 비록 현재는 체력도 다른 병사들한테 뒤지지 않고, 모두한테 사랑 받는 병사가 됐으니, 난 이걸로 충분히 그 교관들한테 보란듯이 복수했다고 생각한다.

Advanced Individual Training(후반기교육)에서 새로운 PLT Sergeant과 새로운 병사들과 함께하면서부터는 BCT 때와는 완전히 상반된 군생활을 했다. 우리 Platoon Sergeant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교관출신이라 가끔은 엄한 PSG였는데, 내 시민권 절차도 잘 처리해 제 시간에 맞춰서 받을 수 있게 노력해줬고, BCT 때 암만 발악해도 교관들이 나한테만 말해주지 않았던 “Good job”이란 말 한 마디를 내 첫 PT 점수가 나온 후에 해주었다. 칭찬을 받을 후론 Motivation이 생겨 더욱 열심히 운동하게 됐고, 날 믿어주는 사람이 실망하지 않도록 좋은 결과로 보답하기 위해 더 노력했다.

내 MOS는 12N Horizontal Construction인데 쉽게 말해 중장비운전병이다. 사실 이 보직은 내가 원하던게 아니었지만, 계약서에 싸인하는 날, 우리학교 근처에 위치한 리저브 유닛에서 필요한 MOS 옵션이 몇 안됐다. 어쩜 1지망부터 10지망까지 미리 생각해둔 MOS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옵션 중에서 입대보너스가 많고 교육기간이 짧은 보직을 고르다가 12N를 선택하게 됐다. 내가 중장비를 운전하게 될 거라곤 1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 나름 소질도 있는 것 같고, 재미도 쏠쏠해서 후회는 없다.

동기애들과 한명도 빠짐 없이 사이가 좋아 9주 교육이라고 느끼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물처럼 흘러갔다. 애들이랑 장난을 치고 받기도 하며, 때론 열심히 챙겨주다 보니 다들 내가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지내는 병사란걸 인정해주어 그동안 BCT 때 받았던 설움을 잊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특히 AIT 땐 같은 중대에 있던 한국인 형동생과 매주말마다 교회랑 PX 가는 재미가 쏠쏠해 주말만 기다리다보니 한 주가 훌쩍 지나갔고 전혀 외롭지 않았다. 마지막 날까지도 웃음이 가실 날 없이 행복한 매일을 보냈다.

AIT 마지막 날이 다 되어 Fort Leonard Wood를 떠나는 날, PSG한테 감사함을 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물론 PSG가 자긴 자기 할 일을 했을 뿐 고마워 하지 말라고 우리한테 당부했지만 말이다. PSG를 뒤로 한채 공항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다시 민간인으로 믿겨지지 않았다. 곧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나의 트레이드마크인 대왕검정뿔테로 갈아끼고 맨투맨과 검정면바지를 입으니깐 군대에서 벗어난게 실감이 났다. 96kg에서 77kg까지 19kg를 감량하느라 헐렁해진 바지를 보니 내심 뿌듯했다. 군대 다이어트가 최고다.

이 글을 통해 그동안의 BCT와 AIT 기간 동안 있었던 일을 팔로업하고, 앞으로는 USAR, 417th EN CO, PFC Jang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아마 한 1년간은 리저브가 아닌 현역으로서 파병 얘기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